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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토 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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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스토 뤼티는 핀란드의 정치인이자 제5대 핀란드 대통령으로,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총리를,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1906년 헬싱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국회의원과 재무장관을 지냈다. 뤼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의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 1944년 사임 후 전쟁 책임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사면되었다. 말년에는 핀란드 국립은행 총재로 복귀했으며, 1956년 사망 후 그의 평판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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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토 뤼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리스토 뤼티
이름리스토 헤이키 뤼티
로마자 표기Risto Heikki Ryti
출생일1889년 2월 3일
출생지후이티넨, 핀란드 대공국, 러시아 제국
사망일1956년 10월 25일
사망지헬싱키, 핀란드
배우자게르다 뤼티 (결혼 전 성: 세를라치우스)
자녀헨리크 뤼티
니일로 뤼티
에바 사크센 (결혼 전 성: 뤼티)
소속 정당국민진보당
서명
정치 경력
임기 시작1940년 12월 19일
임기 종료1944년 8월 4일
총리유카 랑겔
에드빈 링코미에스
전임퀴외스티 칼리오
후임구스타프 만네르헤임
임기 시작1939년 12월 1일
임기 종료1940년 12월 19일
대통령퀴외스티 칼리오
전임아이모 카얀데르
후임유카 랑겔
임기 시작1922년 11월 14일
임기 종료1924년 1월 18일
총리퀴외스티 칼리오
전임에른스트 그라스텐
후임휴고 렐란데르
임기 시작1921년 4월 9일
임기 종료1922년 6월 2일
총리유호 벤놀라
전임조나탄 바르티오바라
후임에른스트 그라스텐
학력
출신 학교헬싱키 대학교
기타
종교신지학

2. 어린 시절

리스토 뤼티는 사타쿤타 후이티넨에서 태어났다.[3] 그의 부모는 농부인 카를레 에베르트 뤼티(Kaarle Evert Ryti)와 이다 비비카 윤틸라(Ida Vivika Junttila)였으며, 7형제 중 한 명이었다. 원래 소농 집안이었지만 뤼티가 어릴 적에는 형편이 나아져 가족이 대농장을 운영했다. 뤼티는 어릴 때부터 책과 학문을 좋아하여 가족 농장 일보다는 공부에 더 몰두했다. 포리 문법학교에서 잠시 공부한 뒤 가정 교육을 받았고, 1906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뤼티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 입학 시험을 통과했지만, 그의 누이 세 명도 대학에 진학했다.

1909년 가을, 제2차 러시아화 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에 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수도 헬싱키의 억압적인 정치적 분위기를 피해, 뤼티는 고향 사타쿤타로 돌아가 라우마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 시기에 핀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인 사업가 알프레드 코르델린을 만나 그의 변호사가 되었고,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도 학업을 계속하여 1912년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4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해사법을 공부하려 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핀란드로 귀국해야 했다. 1916년 게르다 파울라 세를라키우스(Gerda Paula Serlachius, 1886년–1984년)와 결혼하여[4] 슬하에 헨리크(Henrik, 1916년–2002년), 닐로(Niilo, 1919년–1997년), 에바(Eva, 1922년–2009년) 세 자녀를 두었다.[5][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핀란드가 독립하기 전까지 뤼티와 코르델린의 사업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고, 코르델린이 뤼티에게 자신의 여러 사업체의 총괄 관리자 자리를 제안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1917년 11월 7일, 코르델린은 자신의 49번째 생일 축하연 도중 볼셰비키 성향의 러시아 선원들에게 습격당해 살해되었다(모밀라 참살 사건). 당시 핀란드 재봉사가 이끄는 러시아 선원들이 코르델린 일행을 인질로 잡고 강탈하려 했으나, 코르델린의 변호사였던 뤼티는 총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이를 법적으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현장에 있던 백위대 병사들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코르델린을 포함한 20명이 사망했다. 뤼티 부부 역시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적의 총기 오작동 덕분에 간신히 탈출했다.[6] 이 사건과 이후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에 가담했던 동생 닐로가 이칼리넨 전투에서 전사한 경험은 뤼티가 좌파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 초기 정치 경력

1918년~1935년 헬싱키에 있던 뤼티의 집


뤼티의 집 명판


1918년 핀란드 내전 발발 당시, 리스토 뤼티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적군이 장악한 헬싱키에서 가족과 함께 숨어 지냈다. 그러나 내전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19년, 30세의 나이로 국민진보당 소속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당시 의원 중 두 번째로 어린 나이였다. 같은 해, 뤼티가 지지했던 국민진보당 동료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가 핀란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뤼티는 1919년부터 1924년까지, 그리고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의원으로 활동하며 법무위원회와 재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1924년부터 1927년까지는 헬싱키 시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핀란드 역사가 마르티 투르톨라에 따르면, 뤼티의 초기 정치적 성공은 그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성향이 내전 직후 사회 분위기와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국민진보당이 군소정당으로 약화되는 상황에서도 뤼티 개인은 정치적으로 계속 성공했는데, 이는 그가 경제 전문가로 널리 인식되었고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공직자의 이미지를 구축했기 때문이었다.[22][19]

1921년, 32세의 뤼티는 유호 벤놀라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어 1924년까지 두 차례 연임했다.[7] 1923년에는 스톨베리 대통령에 의해 핀란드 국립은행 총재로 임명되었고,[23][8] 1939년 총리가 되기 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실질적인 은행 총재로서의 역할은 1924년 1월 재무장관직을 사임한 뒤부터 시작했다. 정치 활동 초기, 뤼티는 정부 예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성과를 보였다. 그는 스톨베리 대통령 지지자였지만, 적핀란드 가담자들에 대한 사면에는 반대했다. 뤼티는 이들을 범죄자로 간주했으며, 핀란드 내전의 근본적인 사회적 원인을 깊이 고려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1925년, 36세의 나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2차 투표에서는 가장 많은 표를 얻었으나, 3차 결선 투표에서 스웨덴 인민당이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를 지지하면서 109표 대 172표로 패배했다. 1930년대에 들어 뤼티는 일선 정치에서는 한발 물러났지만, 경제 정책 분야에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고전자유주의 경제학의 확고한 지지자였으며, 핀란드 마르카금본위제에 기반한 안정적인 통화로 만들고자 했다.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핀란드는 뤼티의 주도로 디플레이션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고, 1926년에는 금마르카의 가치를 상당히 높게 설정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닥치자 핀란드 역시 영국처럼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부터 뤼티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영국, 미국의 은행업계 사이에 국제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의 경제 정책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으며, 1934년에는 영국-핀란드 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로열 빅토리아 훈장 기사사령관장을 받았다. 특히 영란은행과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대공황 이전까지 금본위제를 고수했던 정책적 공감대와 뤼티의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이었다. 그는 영란은행 고위 관계자들과 정기적으로 통화하며 경제 및 재무 정책을 논의했다. 또한 국제연맹에서도 활동하며 경제 문제와 통화정책 관련 여러 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

1930년대 뤼티는 핀란드 정치의 중요한 막후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사회 정책은 다소 양면적인 모습을 보였다. 실업자 구제나 빈민 구호를 위한 재정 지출에는 반대했지만, 강력한 경제 성장의 혜택은 소수가 아닌 국민 전체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1930년대 후반 핀란드의 사회 복지 정책 수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기본적으로 그는 정부가 상업이나 산업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사회주의 경제, 특히 소련식 모델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러시아 제국 시절의 러시아화 정책과 핀란드 내전을 직접 겪으면서 반소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식 나치즘이나 라푸아 운동과 같은 핀란드 내 극우 정치 운동에도 동조하지 않았으며, 영국식 문화와 미국식 자유 경제를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4. 핀란드 국립은행 총재

1923년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대통령은 뤼티를 핀란드 은행 총재로 임명했다.[23][8] 뤼티는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유호 벤놀라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두 차례 역임했으며,[7] 1924년 1월 재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부터 국립은행 총재직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9년 총리가 되기 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정치 활동 초기, 뤼티는 정부 예산을 정비하는 데 성공했으나, 핀란드 내전 당시 적위대 포로 사면에는 반대했다. 그는 적위대 가담자들을 범죄자로 보았으며, 내전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는 것을 거부했다.

1930년대에 뤼티는 일상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 경제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의 확고한 지지자였으며, 핀란드 마르카의 가치를 금본위제에 고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달리, 핀란드는 그의 주도 하에 디플레이션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고, 1926년 금 마르카로 전환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자 핀란드는 영국을 따라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부터 뤼티는 스칸디나비아의 은행업계와 영국, 미국 등 국제 사회와 활발히 교류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의 경제 정책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으며, 1934년에는 영국-핀란드 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왕실 빅토리아 훈장(KCVO)을 받았다. 특히 영란은행 지도부와는 유사한 경제 정책(대공황 이전까지 금본위제 고수 등)과 뤼티의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경제 및 재정 정책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영란은행 지도자들과 정기적으로 통화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제연맹 활동에도 참여하여 경제 문제와 통화 정책을 다루는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 정치에서 뤼티는 중요한 막후 인물이었다. 그의 사회 정책은 다소 양면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실업자 구제 프로그램이나 빈곤층 지원을 위한 재정 지출에는 반대했지만, 강력한 경제 성장의 혜택은 소수가 아닌 전체 인구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30년대 후반 핀란드의 사회 복지 시스템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반적으로 뤼티는 사업 및 산업에 대한 국가 개입에 반대했으며, 사회주의 경제학, 특히 소비에트 연방식 모델을 거부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 시절의 경험과 핀란드 내전을 겪으며 반소련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독일식 국가 사회주의라푸아 운동과 같은 핀란드 내 극우 극단주의에는 반대했으며, 영국 문화와 미국의 자유 기업 시스템을 존경했다.

5. 총리 임기 (1939-1940)

뤼티는 사회민주당배이뇌 탄네르, 농업동맹 소속의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와 신뢰 관계를 쌓았다. 1939년 가을, 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11월 30일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제안을 수락하여 12월 1일 총리로 취임했다. 뤼티는 상황을 비관하거나 낙관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분석하는 데 집중했으며, 외무장관이 된 탄네르와 함께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뤼티와 탄네르는 모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서방과 가까운 정치인들이었다.

전쟁 초기, 소련은 러시아 젤레노고르스크(당시 테리요키)에 핀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우고 뤼티-탄네르 내각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1939년 12월부터 1940년 1월 사이, 핀란드 육군이 결사적인 방어로 전술적 승리를 거두면서 외교 협상의 길이 열렸다. 결국 소련은 괴뢰 정부를 포기하고 스톡홀름을 통해 핀란드와 협상을 시도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할 움직임을 보인 것도 소련이 협상에 나서게 된 요인 중 하나였다. 뤼티는 다른 각료들을 설득하여 1940년 3월 13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핀란드는 영토의 약 5분의 1을 소련에 할양해야 했고, 해당 지역에 살던 카리알라인 약 4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1940년 12월 19일 취임 선서를 하고 홀로 의회를 나오는 뤼티. 뤼티의 전임자 칼리오가 같은 날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뤼티는 전임 총리 아이모 카얀데르보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40년 8월, 칼리오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총리인 뤼티와 군부의 만네르헤임 원수, 기업가이자 장군인 루돌프 발덴, 외무장관 탄네르가 사실상 국정을 이끌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평화 조약을 주도했던 뤼티는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다.

카리알라 난민 수용 문제 등 어려운 상황 때문에 대통령 간접선거인단 선거를 따로 치르지 못하고, 헌법을 수정하여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선거인단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37년 구성된 의회에서 열린 간접선거 결과, 뤼티는 총 300표 중 288표를 얻어 칼리오의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12월 19일, 칼리오 대통령은 퇴임 전 마지막 군사 사열식에 참석했다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고, 같은 날 뤼티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6. 대통령 임기 (1940-1944)

사회민주당배이뇌 탄네르, 농업동맹 소속의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과 신뢰를 쌓았던 뤼티는 1939년 가을 총리직을 제안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11월 30일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수락하여 12월 1일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현실적인 상황 분석에 집중하며 외무장관이 된 탄네르와 함께 전쟁을 조속히 끝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전쟁 초기 소련은 핀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내세웠으나, 핀란드군의 선전과 서방의 개입 움직임 속에서 결국 협상에 응했다. 뤼티는 내각을 설득하여 1940년 3월 13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서명하여 겨울전쟁을 종결시켰으나, 핀란드는 상당한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뤼티는 전임 아이모 카얀데르 총리보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40년 8월, 칼리오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총리인 뤼티와 만네르헤임 원수 등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 조약을 주도했던 뤼티는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부상했다.

전후 혼란으로 정상적인 선거가 어려워지자, 헌법을 수정하여 1937년 선출된 의회의원들이 대통령 선거인단 역할을 대신하도록 했다. 이 간접선거에서 뤼티는 총 300표 중 288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40년 12월 19일, 칼리오 대통령이 퇴임식 당일 헬싱키 중앙역에서 열린 군 사열식 도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뤼티는 곧바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대통령 임기 중 핀란드는 겨울전쟁 이후 독일과의 관계에 점차 의존하게 되었고,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계속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뤼티의 첫 임기는 1943년까지였으나, 전쟁 중 선거가 어려워 1937년 선거인단이 다시 모여 뤼티를 재선출했다.

1942년 만네르헤임 원수의 75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핀란드를 방문한 히틀러. 가장 오른쪽 인물이 뤼티 대통령이다.


1944년 6월 소련의 대공세(비보르크-페트로자보드스크 공세)로 핀란드는 다시 위기에 처했고, 독일과의 관계도 복잡하게 얽혔다.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방문 이후, 뤼티는 독일의 요구를 개인 서한 형식으로 수락하는 뤼티-리벤트로프 합의를 맺어 군사 지원을 확보했다. 이 지원으로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1944년 7월 뤼티는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혔고 8월 4일 공식적으로 물러났다. 핀란드 의회는 만네르헤임 원수를 후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뤼티의 사임은 독일과의 약속을 개인적 차원으로 묶어두고 후임자가 소련과 협상할 여지를 만들기 위한 전략적 결정으로 평가받는다.[26]

6. 1. 계속 전쟁과 독일과의 협력

겨울 전쟁 이후 핀란드는 기존의 스칸디나비아 국가 의존 정책에서 벗어나 독일과의 관계에 더 무게를 두게 되었다. 이는 본래 친영파였던 뤼티가 적극적으로 추구한 방향은 아니었다. 그는 독일의 본성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24][9] 발트해가 독일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이면서 영국과의 주요 교역로를 상실하자, 독일의 무역 제안 외에는 현실적인 대안이 부족했다.

다른 추축국들과 달리 핀란드는 나치 선전이나 이념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핀란드 내 나치 동조 세력의 활동도 미미했다. 이는 뤼티, 탄네르, 만네르헤임으로 구성된 당시 지도부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된다. 특히 뤼티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격동기 속에서도 핀란드가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40년 8월, 뤼티는 소련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독일과의 비밀 군사 협력에 동의했다. 당시 국제 정세는 독일과 소련 간의 충돌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었고, 많은 전문가들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경우 소련이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뤼티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겨울 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할 기회를 엿보았다. 1940년 후반부터 시작된 양국 간 협력은 1941년에 이르러 상실된 영토 회복과 더불어, 민족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동카렐리아 지역 점령까지 염두에 둔 군사 작전 준비로 발전했다.[10]

1941년 6월,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초기에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며칠 후 소련군이 핀란드 영토를 공습하자, 이를 명분으로 삼아 6월 25일 소련에 선전포고하고 계속 전쟁에 돌입했다. 뤼티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개전을 선언하며 독일의 승리를 예측했는데, 이 연설은 훗날 전범 재판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나중에 독일의 완전한 승리를 확신한 것은 아니었으나, 독일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밝혔다.

핀란드군은 전쟁 초기 겨울 전쟁에서 상실했던 영토를 되찾고 동카렐리아 일부 지역까지 진격하여 완충 지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핀란드 의회 내에서는 겨울 전쟁 이전 국경을 넘어서는 군사 작전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으며, 특히 탄네르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은 동카렐리아 점령에 강하게 반대했다. 뤼티는 사회민주당을 설득하여 연립 내각을 유지하는 데 힘썼고, 1941년 1월부터 1943년 3월까지는 극우 성향의 애국인민운동(IKL)도 연정에 참여했다.[25] 핀란드는 독일 측의 레닌그라드 포위전 협력 요청 등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뤼티의 첫 대통령 임기는 전임자 칼리오의 남은 임기인 1943년까지였다. 그러나 전시 상황으로 인해 정상적인 선거가 어렵게 되자, 1937년 선거인단을 다시 소집하여 뤼티를 대통령으로 재선출하는 특별 조치가 이루어졌다. 뤼티 본인도 전쟁을 시작한 데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기를 원했다. 1942년 겨울을 지나면서 뤼티와 만네르헤임 모두 독일의 최종 승리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지만, 뤼티는 결국 연임 제안을 받아들였다.

전쟁 상황이 변화하면서 평화 협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뤼티는 유카 랑겔 총리 내각 대신 새로운 정부 구성에 나섰다. 국민연합당 의장인 에드빈 링코미에스 교수와의 협상을 통해 링코미에스 내각이 출범했고, 이 정부는 1943년 봄부터 소련과의 비밀 평화 협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새 내각에서는 극우 정당인 애국인민운동이 제외되었다.

뤼티(왼쪽), 만네르헤임(가운데) 그리고 독일 원수 빌헬름 카이텔(오른쪽)


1944년 6월 9일, 소련군이 대규모 공세인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를 개시하면서 핀란드는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핀란드가 소련과 단독 강화를 모색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독일과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고, 독일은 핀란드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6월 20일에는 핀란드 제2의 도시인 비푸리(현재의 비보르크)가 소련군에 함락되었다.

핀란드 정부는 스톡홀름을 통해 소련과 접촉했으나, 소련은 핀란드의 무조건 항복을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 요구를 두고 뤼티와 탄네르는 수용 의사를 보였지만, 만네르헤임과 링코미에스는 반대하면서 정부 내 의견 대립이 심화되었다. 식량과 군수품 부족 문제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절망적으로 흘러갔다.

바로 그때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예고 없이 핀란드를 방문하여, 군사 지원 재개를 조건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계속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의회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뤼티는 만네르헤임과 숙의 끝에 대통령 개인 명의의 서한을 통해 독일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서한은 국가평의회에서 논의되었고, 독일은 이에 만족하며 군사 및 식량 지원을 재개했다. 이 약속은 후에 뤼티-리벤트로프 합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독일의 지원에 힘입어 핀란드군은 탈리-이한탈라 전투에서 소련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며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1944년 7월 중순, 전선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뤼티는 건강상의 이유 등을 들어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의 사임은 8월 4일 공식적으로 수리되었고, 핀란드 의회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만네르헤임을 후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만네르헤임은 취임 직후 소련과의 평화 협상을 재개했고, 9월 모스크바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계속 전쟁을 종결지었다. 이 협정으로 핀란드는 다시 한번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뤼티가 개인적인 약속의 형태로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후임자인 만네르헤임은 독일과의 약속에 구속되지 않고 소련과 협상할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을 확보했다. 이는 독일에게는 기만으로 비쳤지만, 결과적으로 핀란드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평가받기도 한다.[26][12]

6. 2. 사임

1942년 겨울을 지나면서 뤼티와 만네르헤임은 독일의 승리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럼에도 뤼티는 핀란드를 전쟁으로 이끈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하여, 전쟁 중이었던 1943년 선거에서 대통령직 연임을 받아들였다.

뤼티는 유카 랑겔 총리 내각을 유지하기를 바랐지만, 소련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부 구성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이에 따라 국민연합당 총재인 에드빈 린코미에스 교수와 오랜 협상 끝에 1943년 봄 링코미에스 내각이 출범했다. 새 내각은 소련과의 평화 협정 준비에 착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극우 정당인 애국인민운동(IKL)은 내각 구성에서 제외되었다.[25]

그러나 1944년 6월 9일, 소련의 대규모 반격인 비보르크-페트로자보드스크 공세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핀란드가 소련과 단독으로 휴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독일과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였다. 설상가상으로 6월 20일에는 핀란드 제2의 도시 비푸리(Viipuri)가 붉은 군대에 함락되는 등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핀란드 정부는 스톡홀름을 통해 소련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소련 측은 핀란드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두고 뤼티와 탄네르는 수용 의사를 보였으나, 만네르헤임과 링코미에스는 반대하며 정부 내 의견이 갈렸다. 당시 핀란드는 식량과 무기, 탄약 부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예고 없이 핀란드를 방문했다. 그는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대가로 핀란드가 소련과의 전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의회의 승인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한 뤼티는 만네르헤임과 논의 끝에, 뤼티 개인 명의의 서한 형식으로 독일의 요구를 수용하는 타협안을 마련했다. 이 서한은 핀란드 국가평의회에서 논의 및 처리되었고, 독일은 이에 만족하며 군사 및 식량 원조를 확대했다. 이 합의는 후에 뤼티-리벤트로프 합의로 알려지게 된다. 독일의 군사 지원 덕분에 핀란드군은 탈리-이한탈라 전투에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들어선 1944년 7월 중순, 뤼티는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사임을 발표했다. 그의 사직서는 내각에 제출되었고, 1944년 8월 4일 공식적으로 발효되었다. 핀란드 의회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만네르헤임을 후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뤼티의 사임은 독일과의 약속(뤼티-리벤트로프 합의)을 자신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한정시키고, 후임자인 만네르헤임이 독일과의 약속에 구애받지 않고 소련과 새로운 평화 협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독일 측은 뤼티의 갑작스러운 사임과 핀란드의 강화 협상 재개에 크게 놀라며 분노했다.[26][12] 이후 만네르헤임 정부는 모스크바 휴전 협정을 통해 소련과 강화 조약을 맺고 계속 전쟁을 종결시켰다.

7. 말년

대통령직을 사임한 뒤 뤼티는 핀란드 국립은행 총재직으로 돌아갔다. 그전까지 총재직을 맡고 있던 유카 랑겔은 기꺼이 뤼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1944년 가을, 뤼티는 10년 전 대공황 때 그랬듯 통화정책에 강경책을 사용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수출을 증대시켰다.

1945년 봄,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과 소련 측은 소위 핀란드 전쟁 책임 재판을 열 것을 요구했다. 국민들 사이에 뤼티의 평판은 높았고, 애초에 전쟁 자체가 겨울전쟁부터 따지면 소련이 먼저 공격해 온 것이었기에 핀란드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전 외무장관 햘마르 프로코페가 뤼티의 변호인을 맡았다.

소련의 압력이 행사된 끝에 뤼티는 1946년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뤼티 외에 다른 고위 관리 7명도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뤼티의 형기가 가장 길었다. 핀란드 헌법은 이러한 소급입법을 금지하고 있었으나, 이 재판을 위해 특별히 제정된 사후법을 의회에서 헌법 개정의 형태로 통과시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법원과 핀란드 의회에 소련과 영국의 심한 압력이 가해졌다.[27][13]

수감 중 뤼티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종양이 발견되어 위의 대부분을 절제해야 했고, 수감 첫 겨울에는 관절염에 걸렸다. 1949년 다른 전쟁 책임 재판 유죄 판결자들이 가석방되었으나, 뤼티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같은 해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대통령은 뤼티를 사면했다.

리스토 뤼티(Risto Ryti)는 핀란드 전쟁 책임 재판에서. 뤼티 뒤 왼쪽에는 전 총리 에드윈 린코미에스가, 오른쪽에는 변호사 햘마르 프로코페가 있다.


사면된 뤼티는 공직으로 돌아가지 않고 회고록을 집필하려 했지만 건강 악화로 완성하지 못했다. 1952년 대학생들의 축하 행사에서 명예 훈장을 받았다. 정치 일선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투표는 꾸준히 했다. 1956년 5월 헬싱키 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리스토 뤼티는 그 5개월 뒤인 1956년 10월 사망했으며[14], 장례는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갖춰 국장으로 치러졌다.

소련이 붕괴한 뒤 뤼티의 평판은 상당히 복원되었다. 핀란드 정부는 뤼티 등 전쟁 책임 재판 유죄 판결자들의 명예가 애초에 훼손된 적이 없기 때문에 별도의 복권 조치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핀란드의 사법 관례상 형기 자체를 무효화하거나 소급입법을 다시 적용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간주된다.[28]

1994년 의회 의사당 옆에 뤼티의 조각상이 제막되었다. 2004년에는 YLE 방송이 선정한 위대한 핀란드인 조사에서 만네르헤임에 이어 2위로 선정되었다.

8. 개인사

사타쿤타 후이티넨에서 농부 카를레 에베르트 뤼티(Kaarle Evert Ryti)와 이다 비비카 윤틸라(Ida Vivika Junttila)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명의 형제자매 중 7명의 아들 중 한 명이었다. 본래 소농 집안이었으나 뤼티의 유년기에는 살림이 펴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가족의 대농장 일을 거들기보다는 책과 학문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했다.[3] 포리 문법학교에서 잠시 배운 뒤 가정 교육을 받았으며, 1906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 입학 시험을 통과했지만, 누이 세 명도 대학에 진학했다.

1909년 가을, 제2차 러시아화 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에 대학을 졸업했다. 수도 헬싱키의 억압적인 정치적 분위기를 피해 고향 사타쿤타로 돌아가 라우마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 시기 핀란드 제일의 갑부인 사업가 알프레드 코르델린을 만나 그의 변호사가 되었고,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하여 1912년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14년 봄, 해사법을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교로 갔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핀란드로 귀국해야 했다. 1916년 게르다 파울라 세를라키우스(Gerda Paula Serlachius, 1886년–1984년)와 결혼했다.[4] 부부는 슬하에 헨리크(Henrik, 1916년–2002년), 닐로(Niilo, 1919년–1997년), 에바(Eva, 1922년–2009년) 세 자녀를 두었다.[5][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핀란드 독립이 달성되기 전까지 뤼티와 코르델린의 사업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고, 코르델린이 뤼티에게 자신의 여러 사업체의 총괄 관리자 자리를 제안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러나 1917년 11월 7일, 코르델린은 자신의 49세 생일 축하 잔치 도중 볼셰비키 성향의 러시아 선원들에게 저택이 습격당해 살해되었다(모밀라 참살 사건). 당시 핀란드 재봉사가 이끄는 러시아 선원들이 코르델린 일행을 인질로 잡고 강도를 저지르려 했다. 코르델린의 변호사였던 뤼티는 총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강도를 법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다. 무장한 백위대 병사들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상황은 총격전으로 악화되었고, 코르델린을 포함한 20명이 사망했다. 뤼티 부부도 이때 죽을 뻔했지만, 적의 총기 오작동 덕분에 겨우 살아 도망쳤다.[6] 이 모밀라 참살 사건과 이후 핀란드 내전에서 동생 닐로가 백군에 가담했다가 이칼리넨에서 전사한 경험은 뤼티가 좌파를 혐오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뤼티는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1924년에 가입했지만, 핀란드 대롯지의 부대서기관 레이요 아토카리(Reijo Ahtokari)에 따르면 프리메이슨 활동에 매우 열성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범 재판으로 수감된 후에는 범죄 기결수는 회원이 될 수 없다는 회칙에 따라 회원 자격을 포기해야 했다. 역사학자들은 뤼티의 프리메이슨 회원 자격이 그의 정치 활동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에 대해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1941년 1월 그가 총리로 임명한 유카 랑겔 역시 동료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지인이나 친지들의 증언에 따르면 뤼티는 운명의 존재를 강하게 믿었다고 한다. 친구 알바르 렌크비스트(Alvar Renqvist)의 집에서 저녁 식사 후 다른 손님들에게 "나의 삶에서 운명은 지배적인 힘이었습니다. 만약 운명이 호의적이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여기에 앉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핀란드의 유명한 투시 능력자 아이노 카시넨(Aino Kassinen)은 회고록에서 1930년대 헬싱키에서 뤼티를 만났을 때, 그가 사람들이 신성한 힘에 의해 인도된다는 믿음과 신의 존재를 강하게 믿었으며 신지학인지학을 공부했다고 언급했다. 뤼티의 아내 게르다는 남편보다 더 심취하여 스스로를 영적 지도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9.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1차 득표율1차 득표수2차 득표율2차 득표수3차 득표율3차 득표수결과당락
1925년 선거핀란드의 대통령2대국민진보당11.00%33표34.78%104표38.79%109표2위낙선
1940년 선거핀란드의 대통령5대국민진보당97.96%288표 1위
1943년 선거핀란드의 대통령5대국민진보당97.46%269표 1위


참조

[1] 웹사이트 Ministerikortisto http://www.valtioneu[...] Valtioneuvosto 2017-11-00
[2] 서적 Aseveljiä vai liittolaisia SKS
[3] 웹사이트 Tietoa Huittisista: Presidentti Risto Ryti 1889-1956 https://www.huittine[...] Town of Huittinen 2021-12-28
[4] 웹사이트 Ryti, Gerda (1886-1984) https://kansallisbio[...] National Biography of Finland
[5] 서적 Kuka Kukin On (Who's Who) https://runeberg.org[...] 2023-04-10
[6] 웹사이트 "Ase sano klik vaan" – tuleva presidentti Risto Ryti pelastui täpärästi venäläismatruusien luodeilta marraskuun 1917 kahakassa https://yle.fi/uutis[...] 2017-10-28
[7] 웹사이트 Council of State - Ministers of Finance http://valtioneuvost[...] Valtioneuvosto.fi 2018-01-12
[8] 웹사이트 Board Members in the history of the Bank of Finland https://www.suomenpa[...] Bank of Finland 2017-04-13
[9] 뉴스 A silent president has his say http://www.hs.fi/eng[...] 2010-07-26
[10] 웹사이트 Kuusi kohtalokasta päivää, jotka veivät Suomea kohti uutta sotaa https://yle.fi/uutis[...]
[11] 웹사이트 Radio address by President of Finland Risto Ryti 26 June 1941 http://heninen.net/s[...]
[12] 서적 Suomen historian pikkujättiläinen Werner Söderström Publishing
[13] 웹사이트 Kysymys sotasyyllisyystuomion purkamisesta http://www.finlex.fi[...] 1992-11-27
[14] 웹사이트 Muistot: Risto Ryti https://www.hs.fi/mu[...] 2021-12-28
[15] 웹사이트 http://www.riksdagen[...] 2007-10-10
[16] 웹사이트 Valtapeliä elokuussa 1940 (TV Movie 2001) – IMDb https://m.imdb.com/t[...]
[17] 뉴스 Ritarikuntien suurristejä myönnetty 366 https://nakoislehti.[...] 1997-12-06
[18] 뉴스 Unkarin ansio-ritarikunnan suurristi ketjuineen tasavallan presidentille. https://nakoislehti.[...] 1942-02-19
[19] 서적 Risto Ryti : A Life for the Fatherland
[20] 서적 A FROZEN HELL - The Russo-Finnish Winter War of 1939-1940 Algonquin Books of Chapel Hill
[21] 간행물 フィンランド領土割譲、和平協定成る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40-03-14
[22] 서적 Risto Ryti: A Life for the Fatherland
[23] 웹인용 Board Members in the history of the Bank of Finland https://www.suomenpa[...] Bank of Finland 2017-08-07
[24] 웹인용 A silent president has his say http://www.hs.fi/eng[...] Helsingin Sanomat 2010-07-26
[25] 서적 The Republic's Presidents 1940-1956 / Tasavallan presidentit 1940-1956
[26] 서적 Suomen historian pikkujättiläinen Werner Söderström Publishing
[27] 웹사이트 Kysymys sotasyyllisyystuomion purkamisesta http://www.finlex.fi[...] 1992-11-27
[28] 웹사이트 http://www.riksdagen[...]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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